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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특별기고]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칼럼 김진경] '김훈' 작가의 '서이초' 관련 글을 읽고

퍼스트무버 2023. 9. 25. 11:16

[김훈 특별기고]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입력2023.08.04. 오전 6:00  수정2023.08.04. 오전 7:36 


[특별기고] 소설가 김훈, 교사 집회현장을 가다

 


지난달 29일 오후 2시에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서울 광화문 앞 거리에 모여서 ‘교육권 보장’을 외쳤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고 짓밟히는 교육자의 고통을 호소했다.

교사들은 교육자의 ‘교권’뿐 아니라 ‘인권’과 ‘생존권’까지도 절규했다.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10여 명이 이날 집회에 참가했고, 교수 102명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교사들은 교원단체나 노동조합이나 소속 학교의 깃발을 내세우지 않고 다만 ‘전국교사일동’의 이름으로 집회를 열었다. 행사를 진행하는 중견 교사는 참가자들에게 “배포된 피켓 이외의 구호를 외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이날 집회가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되는 사태를 교사들 스스로가 경계하고 있음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집회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3만여 명의 교사는 선생 노릇 하기의 어려움을 일기에 써놓고 자결한 젊은 여교사의 죽음을 애도했고, 고인이 아이들과 함께 이루고자 했던 뜻을 추모했다. 이날 낮기온은 34도였고, 아스팔트 위의 온도는 50도가 넘었다. 길바닥의 주저앉은 검은 상복의 대열은 길어서 끝이 아물거렸고, 아스팔트가 뿜어내는 열기 속에서 흔들렸다. 그 고통스러운 대열이 외쳤다.

 


“공교육은 죽었다” 그 배후는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


-공교육은 죽었다.

이날 교사들이 절규하는 고통은 실체가 분명했다. 요약하자면, 교육을 망치는 가장 큰 해악은 ‘악성 민원’이고 교육청, 교장, 교감 등 교육의 관리자들은 이 사태의 뒷전으로 물러서 있다는 말이다. 이날 집회에서 교사들은 ‘학부모’라는 익명의 거대 집단을 직접 겨냥해서 발언하지 않았고, 다만 ‘악성 민원’이라고, 에둘러 가는 언어를 사용했다. 교사들의 조심스러운 태도에는 어쨌거나 학부모들이 교육의 과정을 함께 수행해 나가야 할 파트너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교사들이 자신들의 집회에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학부모’에 대해 거친 언사를 쓰지 않는 조심스러움에서 나는 교사들의 집단지성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악성 민원’은 학생들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제기해 온 것이므로, 무대 조명 안으로 소환되지 않은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은 이 사태의 핵심이며 배후였다.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도심의 거리에 모여서 교육에 가해지는 학부모 집단의 행태에 절규하고 저항하는 사태는, 아마도 세계 공교육의 역사상 초유의 일일 것이다. 이날, 검은 상복의 대열은 폭염 속에서 거듭 외쳤다.

 


-공교육은 죽었다.


젊은 여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서울 서이초등학교 주변 일대는 전국의 교사와 시민들이 보내온 조화로 도시의 한 블록이 뒤덮였다. 한 새내기 여교사의 죽음에 모이는 이 거대한 조문의 대열은 공교육이 이 사회의 저변에서 일상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붕괴되어갔던 사태를 증언하고 있다. 사람이 모이고 말이 들끓는 자리에 얼굴을 들이밀고 마이크 잡기를 좋아하는 정치세력들은 이 조문의 대열에 조화를 보내오지 않았다. 판세에 민감한 그들은 학부모 집단과 교사 집단의 갈등이라는 이 사태의 심층구조가 얼마나 두렵고 또 난감한 것인지를 알고 있고, 진영의 입장으로 여기에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득 될 것이 없다고 정세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겠지만, 인산인해를 이룬 이 고통스러운 조문 행렬이 보여주는 탈정치, 무정치의 풍경은 정치의 부재, 정치의 실종을 느끼게 했다. 그토록 끓어 넘치는 정치는 다 어디로 갔는가. 서이초등학교의 건물과 담장에는 여러 지방에서 온 교사들이 고인이 된 여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스트잇으로 붙어 있다.

-너도나도 당하면서 이게 우리 직업이려니 하면서 참고 살았습니다.

-다들 당하는 걸 보면서 ‘난 운이 좋아서 안 당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당함에 맞서는 사람이 되라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과 똑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제가 먼저 소리 내지 못했습니다.



이 슬픈 편지들의 전언은 힘없는 자들의 힘이 무수한 파편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울음을 따로 우는 소리로 들렸다. 교사들은 이 편지에서도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을 직접 호출하지 않고 있다. 나는 교사가 아니므로, 이 ‘악성 민원’의 실체를 교사들보다 덜 점잖은 언어로 말하려 한다. ‘악성 민원’의 본질은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내 새끼’를 철통 보호하고 결사옹위해서 남의 자식을 제치고 내 자식을 이 세상의 안락한 자리, 유익한 자리, 끗발 높은 자리로 밀어 올리려는 육아의 원리이며 철학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의 자식이 겪게 되는 작은 불이익이나 훼손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관계망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내 자식’을 편드는 부모의 싸움으로 확전돼 교사를 괴롭히는 사례는 흔하고, ‘내 자식’을 편들며 달려드는 학부모의 태도는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와 같다고 경험 많은 교사는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식을 명품 시계나 고가 핸드백처럼 물신화한다. 이것은 이제 이 난세의 생존술이고 이데올로기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일선 교사들의 고백은 이들을 행세하게 하는 부(富)의 천민성을 증언하고 있다. 사실, 이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나라 수많은 권귀(權貴)들에 의해 완성됐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온 고위 공직자 후보들은 너도나도 그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내기 위해 실정법을 위반해 가며 학원 좋고 학군 좋은 동네로 거듭 위장 전입을 해왔는데, 이 정도 범죄는 매우 경미한 사안이다. 위장 전입이 문제돼 공직 임명에서 탈락한 사람은 없다. 이런 위법행위들은 애끓는 모성애, 부성애, 또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의 미담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공동체의 가치는 파괴됐고, 공적 제도와 질서는 빈껍데기가 되었다.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 영세불망(永世不忘):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말이다. (永: 길 영, 世: 세상 세, 不: 아니 불, 忘: 잊을 망)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마음 속에 깊이 새겨 늘 기억한다는 말이다. 아픈 상처나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강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잊혀지지 않는 경우에도 쓰이지만, 주로 어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나 고마움, 남에게 입은 은혜나 감동에 감격하여 스스로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뜻을 강조할 때 많이 쓰인다. 
  • 미망(迷妄):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맴. 또는 그런 상태.
  • 무명(無明): (불교)십이 연기의 하나.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이른다.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새내기 여교사의 죽음과 전국 교사들의 대규모 조문 사태는 한 시대의, 전체의 통렬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내 새끼 지상주의’로 몰락해 가는 현실을 향해 ‘반성’을 말하는 것은 무력한 관념의 신음처럼 들리지만 뉘우침의 진정성이 없다면 문제를 헤쳐 나갈 추동력은 발생하지 않는다.

정부가 내놓은 ‘해법’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동학대 처벌법을 고쳐서 ‘정당한 지도 행위는 신고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조항을 신설하자는 것이다. 여야는 이 법안에 대해 의견이 접근해 가고 있다고 여러 매체가 보도했다. 이 법안이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정당한’이라는 한마디의 형용사는 며칠 전 야당이 방탄 국회라는 비난을 벗어나기 위한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정당한 영장청구에는 면책특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정한 것과 똑같다. 이것은 언어의 농간(弄奸)이다. ‘정당한’이란 한마디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 형용사는 매끄러워서 붙잡을 수 없고 아리송해서 기댈 수 없다. 이 몽롱한 형용사 한 개로 괴물을 막으려 한다면 더 큰 괴물이 달려든다. 두 번째 괴물은 더 많은 언어와 세련된 논리를 동반하고 달려들게 되는데 이 세련된 논리는 사태를 정돈하지 않고 더욱 헝클어 버려서 수렁으로 빠뜨린다.

상처받은 교사들에게 직무 연수교육을 강화하고 심리상담과 치료를 해주겠다는 ‘대책’은 고마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 사태의 본질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교사들은 말했다. 교사들의 경험 부족, 자질 부족, 열정의 부족으로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 아니며, 민원을 퇴치하는 개인기를 길러주고 상처를 힐링해 주겠다는 것은 개선책이 아니라고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은 말했다. 교사들은 개별적 교사 한 명씩을 이 무겁고 또 무서운 사태 앞으로 내세우지 말고, 교육청, 교장, 교감이 교사들과 함께 사태의 전면에 나서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지위 높은 선생님들은 사태를 빙 돌아서 형용사 ‘정당한’ 뒤로 숨어들고 있다.

29일의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던 교직 2년 차의 젊은 교사는 이날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이초등학교 분향소에 들러 숨진 동료 여교사에게 바치는 편지를 써서 붙였다.

-오늘 4만 명이 거리에 모여서 외쳤습니다. 교육대학교 교수님들도 함께 외쳤습니다. 다들 함께 외쳤습니다. 다들 함께 외쳤으니까 이제 무언가 달라지겠지요. 선생님.

편지는 ‘함께 외쳤다’는 사실을 희망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이날 현장에서 이 젊은 교사의 ‘희망’은 아직은 울음으로 보였다. 광화문 앞거리의 거대한 울음은 이 시대의 지층 맨 밑바닥까지 울려야 하는 울음이다. 숨진 여교사는 지금 이름도 없고 사진도 없다. 숨진 여교사가 이름 석 자와, 웃는 표정의 사진으로 돌아오기를 교사들은 바라고 있었다.

‘전국교사일동’은 8월 5일 토요일 광화문 앞거리에서 다시 모인다.

◆김훈=1948년 서울 출생. 한국일보 등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뒤늦게 작가가 됐다. 장편소설 『하얼빈』 『칼의 노래』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산문집 『연필로 쓰기』 등이 있다. 동리문학상·황순원문학상·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대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소설가 김훈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5/0003298576?sid=102

 

[김훈 특별기고]'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소설가 김훈, 교사 집회현장을 가다 지난달 29일 오후 2시에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서울 광화문 앞 거리에 모여서 ‘교육권 보장’을 외쳤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고 짓밟히는 교육자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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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진경] '김훈' 작가의 '서이초' 관련 글을 읽고


김진경 전 국가교육회의 의장

 



'교육권'에 대한 새로운 합의 필요

얼마 전 중앙일보에 김훈 작가가 서이초 사태에 대해 쓴 르뽀성 기사를 읽었다. 교사들의 광화문 집회 현장을 스케치하며 소감과 서이초 사태에 대한 인상 비평적 생각을 쓴 이 글은 우리나라 학부모의 “내 새끼 지상주의”를 사태의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내 자식만 공부 잘하고 출세하여 잘 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식이 조금이라도 불리한 상황에 놓이는 것은 내가 눈 뜨고 있는 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학부모, 그 중에서도 힘 있는 학부모의 갑질로 인한 교권 침해가 사태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학교교육에 대해 시간을 할애하여 깊이 들여다보기 어려운 작가의 입장에서 쓸 수 있는 인상비평으로서 있을 수 있는 글이다. 다만, 오늘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의 균형에 보탬이 되고자, 글을 덧붙인다.

우선 눈에 걸리는 것은 우리나라 학부모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내 새끼 지상주의”이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자기 자녀를 넘어 어린 세대 전체에 대한 공적 관심으로 확대되면 교육과 사회 발전의 건강한 동력이 된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어린 세대 전체에 대한 공적 관심이 배제된 사적이고 편협한 자녀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우선 떠오르는 의문은 우리나라 학부모가 보편적으로 “내 새끼 지상주의‘에 빠져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우리나라의 학부모가 ”내 새끼 지상주의“라는 공통의 질적 특성을 가질 만큼 동질적 집단인가 하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못 살았던‘ 60년대 70년대에는 학부모라는 집단에 일정 정도 동질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계급 계층이 분화되고 고착된 지금, 학부모는 동질적 집단이 아니라 이질적 집단들의 복합체이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대다수의 학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지만 먹고 살기 바빠서 교육적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고, 중간층의 상당 부분은 상대적으로 학교교육에 대한 기대가 남아있고 공적 관심도 일정 정도 가지고 있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대체로 상층에 국한된 학부모의 문제

이른바 “내 새끼 지상주의”의 주인공은 대체로 상층에 속하는 학부모의 문제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가 나타나는 이유도 개인적 성향의 문제라기보다는 계급 계층이 고착되어 가는 단계에서 갖는 추락에 대한 불안감에 있을 것이다. 이 불안감 때문에 교육적 구별짓기를 강화하여 아래 계층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장벽을 높이고 현재 가지고 있는 지위를 특권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에 사회문제로 되었던 정순신과 이동관 자녀의 학폭과 그를 무마하기 위한 부모 지위의 특권적 활용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위와 같이 살펴보면 서이초 사태를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태의 진실을 가려 사회 지도층의 잘못을 일반 국민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게다가 “내 새끼 지상주의”를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운명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향처럼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담당자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조선 엽전들은 꼭 때려야 말을 들어. 어쩔 수 없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서이초 사태로 표출된 교육문제의 원인을 학부모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향에서 찾으면, 그 문제의 해결은 학부모 개인의 도덕적 각성과 시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해결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일시적이고 부분인 해결을 확대하고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권위적 지도자의 금지와 억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과거 식민주의자나 권위주의 정권 논리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닐까?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충분한 사회적 합의에 바탕한 시스템과 제도를 통해 발현되면 교육과 사회 발전의 건강한 기본 동력이 된다. 따라서 이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일정 부분 “제 새끼 지상주의”로 왜곡되어 학교교육에 장애가 되고 있다면, 그 주된 원인은 학부모 개인 개인의 성향에서 찾기보다는 그 시대에 맞는 사회적 합의의 부족과 그것에 바탕한 시스템과 제도의 결함에서 찾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학교교육 제도와 시스템의 기반이 되는 사회적 합의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아야 하겠다.

학교교육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민이 학교나 지방정부에, 국민이 국가에 자녀교육의 권한을 위임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주민이나 국민이 학교나 지방정부, 국가에 자녀교육의 권한을 위임하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학교나 지방정부, 국가가 갖는 교육권이다. 교사의 교권은 이 교육권의 일정 부분을 위임받음으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정상적 교육이 어려울 만큼 교사의 교권이 흔들린다는 것은 학교교육 성립의 근거인, 사회적 합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학교교육의 존재 근거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셈이다.

‘국민이 국가에 자녀교육의 권한을 위임했다’는 개념 성립

교육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역사적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미국이나 서구의 여러 국가들처럼 주민이 자녀교육의 권한을 학교에 위임하고 그 위임 단위가 지방정부, 중앙정부로 올라가는 상향식이다. 이러한 상향식은 근대 공교육의 자연발생적 형태일 것이다. 이 경우는 자녀교육의 권한 위임이 직접적이어서 교육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상대적으로 공고하다고 볼 수 있다.

그 둘째는 한국처럼 국민이 자녀교육의 권한을 국가에 위임하고 국가가 위임받은 교육권을 학교에 위임하는 하향식이다. 이러한 하향식은 근대 공교육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 경우는 자녀교육의 권한 위임이 간접적이어서 교육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공교육은 구한말 독립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사립학교 설립운동이 상향식의 형태를 보였으나 미미했고, 일제에 의해 보편적 공교육이 하향식으로 도입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민립학교설립운동이 일어나 상향식의 형태를 보였으나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민립학교를 불법화하여 폐교시키고 하향식의 공교육제도를 정착시켰다. 한국의 근대 공교육은 한국인의 뜨거운 교육열에 바탕하여 발전해왔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일정 정도 교육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외세에 의해 하향식으로 정착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불완전한 사회적 합의이다.

이렇게 외세에 의해 하향식으로 정착된 한국의 공교육에 대한 내적 동의와 사회적 합의가 강화된 것은 박정희정권 때다. 박정희정권이 추구한 서구모델 따라가기 경제 근대화는 상당 정도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강력한 사회적 지향성으로 정착하였다. 서구모델 따라가기 경제 근대화에 대한 동의는 곧 서구지식 수입형의 하향식 공교육에 대한 동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빨리빨리 받아들여 될 수 있으면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에게 주입 암기케 함으로써 서구 선진국을 하루 빨리 쫓아가야 한다.’를 모토로 하는 서구모델 따라가기 경제근대화는 강력한 국가 주도의 하향식 공교육을 핵심 수단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자녀교육의 권한을 국가에 위임했다.’는 공교육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박정희 정권 시대에 비로소 실효적 의미를 갖게 된 셈이다.

서구 모델을 신속히 따라가기 위한 하향식 공교육은 서구 지식 수입통로에 가까운 순서대로 학교를 서열화한다. 서구지식 수입통로에 제일 가까운 서울대 1번, 서울에 있는 대학 그 다음, 지방대 그 다음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학생들을 서구 지식을 얼마나 많이 잘 암기하였느냐에 따라 획일적으로 줄을 세운다. 또한 서구 교육모델에 대해 정통한 중앙의 전문가와 관료가 교육내용과 정책을 결정하여 학교현장에 지시 형태로 내려 보내고 교육청과 교육지원청이 관리 감독하는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행정체계를 갖게 된다.

교육권 위임 개념의 형해화

박정희 시대에 실효화된 ‘국민이 자녀교육의 권한을 국가에 위임했다’는 교육권 개념은 그러나 90년대를 넘어서며 내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하여 오늘날엔 거의 앙상한 형해만 남아있는 형국이다. 그 근본적 원인은 여러 가지로 지적해 볼 수 있다.

첫째, 산업화 시대에는 지식의 수입 통로가 단일하여 국가가 그 지식의 수입과 배분을 독점적으로 관장할 수 있었지만, 지식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는 디지털 시대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국가가 독점적으로 관장하는 중앙집권의 하향식 학교교육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사회적 합의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둘째, 60, 70년대에는 비슷비슷하게 못 살아 국민의 학교교육에 대한 요구가 사회 경제적 지위 향상으로 단일한 편이었으나, 80년대를 지나면서는 한국사회도 계급 계층이 분화 고착화되어 학교교육에 대한 요구가 다양해진다. 하향식의 획일적 교육은 이 다양해지는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점점 신뢰를 잃어갈 수밖에 없다.

셋째, 특히 90년대를 분기점으로 사교육의 성격이 바뀐 점은 학교교육의 교육권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회 경제적 지위향상이 주된 교육적 요구였던 60-80년대에는 사교육이 학교교육의 보조적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계급 계층이 분화 고착되기 시작하면서 사교육의 동인이 상승에 대한 욕망에서, 추락에 대한 불안감으로 바뀐다. 추락에 대한 불안감 해소에는 다른 아이들도 똑같이 받는 학교교육의 반복은 별 의미가 없고, 다른 아이들이 받지 못하는 교육을 더 받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되면 사교육이 학교교육의 변별력을 대체하는 성격을 갖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교과서 밖의 난이도가 높은 지문을 활용하는 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되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지금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사실상 두 개다. 교과서로 표출되는 학교교육과정을 잘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다. 좋은 대학 진학 여부를 가르는 변별력은 교과서 밖에서 출제되는 수능이 가지고 있다. 이에 최적화된 우수한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가기 어렵다.

넷째, 지능정보사회, 본격적 소비사회로 진입하면서 아이들의 의식구조가 산업화 세대의 의식구조와 다르게 변화했고, 그에 따라 가치 지향이 다원화되었다. 또한 가족의 해체, 지역사회의 해체로 가족과 지역사회의 보호교육기능이 공동화되면서 아이들이 자기형성에서 다양한 문제를 안고 학교교육에 진입한다. 이렇게 다양한 상황에서 다원적 가치 지향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하향식의 획일적 교육시스템으로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80년대까지는 없거나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었던 교실붕괴, 왕따, 학교폭력이라는 단어가 90년대 이후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다섯째, 특히 학교폭력과 관련하여 사회변화에 걸맞은 학생생활 지도 시스템을 학교 내에 구축하지 못하고 외부의 사법 시스템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관련 정책이 전개되면서, 학교의 학생생활 관련 기능은 마비되고 공동화되었다.

여섯째, 이러한 사태를 ‘변화된 디지털사회, 새로운 교육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제도와 시스템 개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적 메카니즘 도입으로 대신한 정부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도 문제를 악화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지식전수 기능의 핵심적 부분을 사교육이 가져가고, 학생생활 지도의 핵심적 부분을 외부의 사법체계가 가져간 학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시간제 보호감호’ 시설로 전락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두가 피해자인, 이때가 개혁 적기

꿈꾸었던 교육이 아니라 별 통제수단이나 권한도 없이 ‘시간제 보호감호’를 감당해야 하는 교사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되었다. 서이초 사태는 그것이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진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의 피해자가 교사뿐일까? 별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졸업장이라는 자격증을 위해서든, 맞벌이로 달리 맡길 데가 없어서든,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학교에 맡기고, 할 말이 있어도 대부분 참고, 참지 못하면 학교교육의 한 주체로서가 아니라 겨우 개별 민원인으로서 등장해야 하는 학부모도 피해자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피해자는 별 의미를 못 느끼는 시간을 학교에서 지루하게 보내야 하는 아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교육적 역할이 상당 정도 마비된 학교에 어쩔 수 없이 막대한 세금을 써야 하는 국민과 국가기구도 피해자다.

그래서 우리사회의 상층은 학교교육을 계급 계층적으로 분리하고자 하는 요구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정책이 특목고나 자사고로 현실화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정책이 성공적인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순신과 이동관 자녀의 극단적 학교폭력이 ‘민족사관학교’, ‘하나고’라는 고급 자사고에서 일어났고, 특목고를 나오고 교대를 나온 초등학교 초년 교사들이 갑질에 시달려 죽음으로까지 내몰리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구별짓기 욕망은 끝이 없어서 학교를 계급 계층에 따라 나눈다 해도 왕따와 학교폭력은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학교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변화된 사회에 맞게 교육권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그에 따라 학교교육 제도와 시스템을 재구조화하는 것이다. 나는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버린 이 시점이야말로 사회적 협의와 대타협을 통해 새로운 교육권에 대한 합의를 이루고 그에 바탕한 교육제도와 시스템 개혁을 시작할 수 있는 적기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사회, 새로운 교육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목적으로 하는 국민운동본부라도 만들어 이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러한 시민운동이 충분히 전개되어, 시민적 힘이 뒷받침되어야, 국가교육위원회도 실효성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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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진경] '김훈' 작가의 '서이초' 관련 글을 읽고

얼마 전 중앙일보에 김훈 작가가 서이초 사태에 대해 쓴 르뽀성 기사를 읽었다. 교사들의 광화문 집회 현장을 스케치하며 소감과 서이초 사태에 대한 인상 비평적 생각을 쓴 이 글은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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