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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20대 남성은 정치적 선동에 놀아났나?

퍼스트무버 2022. 3. 28. 18:04

강준만, 20대 남성은 정치적 선동에 놀아났나?

 


불평등은 주로 '사건'이나 '사고'의 관점에서 다뤄진다. 큰 사건이나 사고가 터질 때에만 언론의 관심이 집중될 뿐이다. 이는 인구의 절반이 사는 지방이 평소 언론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불평등의 뉴스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데, 이는 학계의 도움이 필요하다.
청년 남성 모임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 회원들이 지난달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우리는 이대남이 아니란 말입니까?’ 기자회견을 열어 성차별과 혐오를 멈출 것을 촉구하고 있다.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이 최근 출간한 <그런 세대는 없다: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를 읽었다. 내가 보기엔 탁월한 책이다. 저자는 정치권과 언론이 사랑하는 세대론에 정면 도전하면서 세대론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세대 간 허구적 대립을 부추기지 말고, 계급 불평등에 주목하라고 촉구한다. 나는 이 책의 주장에 대체적으로 동의하지만, ‘악마의 변호인’ 역할을 자청해 꼭 생각해볼 점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다. 취지엔 공감하면서도 표현이 좀 불편하게 여겨졌던 걸 몇가지 들자면 다음과 같다.

“청년들의 분노를 부채질하여 ‘내 편’으로 만드는 행동들이 정치권부터 언론과 지식인 사회에 이르기까지 두루 존재한다.” “기성세대라는 가상의 악을 만들어 청년들에게 비난의 대상을 만들어주고 청년의 편인 듯 가장하여 인기를 얻으려는 발상은….” “최근 (여러 분야의 거대권력을 쥔 자들)은 ‘청년’을 소리 높여 말함으로써 기대할 만한 이익이 많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기 시작했다.”

강한 어조로 메시지를 선명하게 하려는 뜻은 이해하지만, 세대론을 말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하는 게 문제 해결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질문을 해보는 건 어떨까. 세대론이 사라지거나 약화되면 그만큼 불평등이 주요 사회적 의제로 떠오를까? 나는 비관적이다. 그래서 불평등 문제를 포기하자는 게 아니라 한걸음 더 들어간 실천적 고민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여권이나 진보층엔 이준석을 비롯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20대 남성을 선동했으며, 20대 남성은 그런 선동에 놀아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과연 그런가? 정치인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동시에 20대 남성의 자유의지와 정치적 역량을 과소평가한 건 아닐까? 나는 <k-를 생각한다:  90년대생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저자인 임명묵의 다음 견해에 동의한다.

“사실은 반대다. 일부 20대 남성이 자신들의 문제의식에 응답하는 정치인에게 표를 주겠다고 공표하며 정치인들을 길들였다.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상황을 몰아간 것이다. 유권자가 정치인들을 뒤흔들며 통제한 셈인데, 미디어 시장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이는 ‘팬덤정치’의 메커니즘과 비슷하다. ‘침묵하는 다수’는 여론조사나 선거 때 자신의 선택을 밝히는 걸 제외하곤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길이 없다. 정당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전체의 1%도 안 되는 팬덤이나 열성 지지자들이다. 누가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느냐가 중요하다. 정치권과 언론이 그런 목소리에 큰 영향을 받는 걸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건 기존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언론의 작동 방식 역시 본원적 한계다. 언론은 그들이 천명한 사명과 시장에서의 생존이라는 ‘이중 구속’ 상태에 처해 있다. 시장에서의 생존이 사명을 훼손하거나 약화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에선 이런 ‘시장 저널리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총체적 대안이 있는 것 같진 않다. 전면적인 ‘언론 공영화’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시장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세대론은 풍부한 뉴스가치를 갖고 있다. 어느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대 담론은 쉽고 재밌다.” 어디 그뿐인가. 절박한 ‘피해자’들도 있다. 학자들은 계급의 문제를 들어 그런 세대론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지만, 저널리즘은 목소리에 민감하다. 주요 뉴스가치 중의 하나인 ‘중요성’은 국가적 중요성이라기보다는 언론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중요성을 의미한다. 대학과 더불어 부동산이 절대적 뉴스가치를 갖는 걸 보라.

반면 불평등은 뉴스가치가 약하다. 불평등은 주로 ‘사건’이나 ‘사고’의 관점에서 다뤄진다. 큰 사건이나 사고가 터질 때에만 언론의 관심이 집중될 뿐이다. 이는 인구의 절반이 사는 지방이 평소 언론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불평등의 뉴스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데, 이는 학계의 도움이 필요하다.

불평등 문제를 다룬 좋은 논문들이 많지만, 이는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학자들도 ‘언론플레이’를 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자신의 논문을 알리려고 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고작 수십에서 수백명의 학자들이 읽고 끝나는 논문으로 사장되고 만다. 나는 관련 학계가 언론홍보를 전담하는 분과위원회를 두기를 제안한다. 언론이 좋아하는 뉴스가치 중심으로 쉬운 보도자료를 작성해 언론과 정치권이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자는 것이다. 이게 진정한 산학협력이 아닐까?



https://news.v.daum.net/v/20220327153602721

 

[강준만 칼럼] 20대 남성은 정치적 선동에 놀아났나?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이 최근 출간한 <그런 세대는 없다: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를 읽었다. 내가 보기엔 탁월한 책이다. 저자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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